읽을거리 – 조선시대 ‘한성부’의 별별 업무

한성부의 출범과 위치

한양부를 고쳐서 한성부라 하고, 아전들과 백성들을 견주(見州)로 옮기고 양주군(楊州郡)이라 고쳤다. — 1394년 6월 6일 『태조실록』

1394년 6월 6일 『태조실록』의 기록은 한성부의 출범을 공식적으로 알리고 있다. 『연려실기술』, 태조조고사본말(太祖朝故事本末), 개국정도(開國定都)에는 "한성부는 본래 고구려의 북한산군(北漢山郡)이었다. 그 뒤에 신라 진흥왕이 북한산에 이르러 국경을 정하고 18년에 북한산주 군주(軍主)를 두더니, 경덕왕이 한양군(漢陽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또 양주(楊州)라고 고쳤고, 문종이 남경(南京)이라 하고 남경 유수(留守)로 승격하였다. 충렬왕이 한양부(漢陽府)라고 고쳤다. 태조 3년에 도읍으로 정하였다."고 하여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 때까지 한성부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조선후기의 지도학자 김정호(金正浩)가 1820년경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수선전도(首善全圖)에는 당시 한성부의 경계가 표시되어 있는데, 동쪽은 중랑천, 서쪽은 불광천과 홍제천, 남쪽은 한강, 북쪽은 북한산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한성부가 위치했던 곳은 현재의 세종로 교보빌딩 북쪽 일대였다. 19세기 중반 한성부에 관련된 각종 내용을 정리한 지지(地誌)인 『경조부지(京兆府誌)』에 의하면 "한성부 관아는 중부 징청방(澄淸坊)에 있었으며, 그 남쪽에는 호조가 있었고, 북쪽에는 이조(吏曹)가 있었으며, 동쪽에는 하천이 흘렀고, 서쪽에는 큰 도로가 있었다."고 하여, 오늘날 교보빌딩 북쪽 지역에 한성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청사의 규모는 172칸이었는데 그중 99칸이 호적(戶籍)을 보관하기 위한 건물이었다. 그만큼 한성부 업무 가운데 가장 중요했던 것이 호적을 관리하는 일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번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에서도 호적을 다수 전시하고 있다.

한성부의 직제와 하는 일은?

현재의 서울시장과 같은 역할을 한 **판윤(判尹)**은 정2품직으로, 현재의 정부 부처 장관급인 판서(判書)와 동일한 직급이었다. 현재의 도지사와 같은 각도의 관찰사 직급이 종2품(현재의 차관급)인 것과 비교하면, 당시 한성부의 위상을 알 수 있다.

부시장에 해당하는 종2품 좌윤(左尹)과 우윤(右尹) 각 1명씩을 두었다. 이어 종4품인 서윤(庶尹) 1명, 종5품 판관(判官) 2명, 정7품 참군(參軍) 3명 등을 배치하였다.

이들 정식 관원 이외에 문서 정리, 경비, 심부름 등 잡일을 담당하는 이속(吏屬)들이 있었다.

구분직책인원
이서(吏胥)서리(書吏)41인
호적서원(戶籍書員)11인
서사(書寫)1인
소차서리(疏箚書吏)3인
대령서리(待令書吏)1인
고직(庫直)1인
소계58인
도예(徒隷)사령(使令)47명
구종(驅從)14명
군사7명
소계68명

조선의 헌법인 『경국대전』에는 정2품 아문 한성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경도(京都)의 인구(人口)와 장적(帳籍: 호구와 토지 대장), 시전(市廛), 가사(家舍: 가옥), 전토(田土), 사산(四山: 서울의 동서남북을 둘러싼 낙산, 인왕산, 목멱산, 백악산), 도로, 교량, 구거(溝渠: 하수도), 포흠(逋欠: 관물을 빌려서 갚지 않는 것), 부채(負債), 투구(鬪毆: 서로 다투어 죽이거나 상해를 입히는 것), 주간순찰(晝間巡察), 검시(檢屍), 거량(車輛: 수레), 고실우마(故失牛馬: 도살한 소와 말)의 낙계(烙契: 증명서) 등에 관한 일을 맡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하부 직제로는 육방(六房)이 있어서 각기 담당 업무를 맡았다.

  • 이방(吏房) — 인사 업무
  • 호방(戶房) — 가사(家舍)와 호적, 재정, 경비 지출 등
  • 예방(禮房) — 산송 업무
  • 형방(刑房) — 주로 시신(屍身)의 검안(檢案)과 마을 침입 금지
  • 병방(兵房) — 궁성(宮城)과 도성 순찰, 금화(禁火: 소방)
  • 공방(工房) — 도로와 개천, 교량의 관리 및 보수

서울의 산에 있는 송충이를 퇴치하는 것도 한성부의 몫이었다. 『중종실록』에는 "근래 살펴보면 작년부터 경성(京城) 10리 사이의 소나무들을 송충이가 모두 먹었고 능침의 소나무들까지도 송충이가 모두 먹었는데 한성부가 송충이를 잡으려 해도 다 잡을 수가 없습니다."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한성부가 송충이를 잡는 일로 매우 힘들어하는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서쪽 성밖에서 호랑이가 사람을 물었다는 것으로 한성부에서 아뢰었다."는 『정조실록』의 기록을 통해서는 호환(虎患) 피해에 대한 대처도 한성부에서 맡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 내 손안의 서울 https://mediahub.seoul.go.kr/archives/2018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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