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 중 하나는 남산이다. 서울의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서울의 전체 모습이 조망되기 때문이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 중심에 산이 자리 잡은 모습은 외국인들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 강을 끼고 있는 대도시는 흔히 볼 수 있지만, 도심 한복판에 큰 산이 있는 사례는 많지 않다.
조선시대 남산의 역사
1394년 10월 한양 천도를 단행한 태조 이성계는, 같은 해 12월에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명하여 황천(皇天)과 후토(后土)의 신에게 제사를 올려 왕도의 공사를 시작하는 사유를 알리는 고유문을 발표하였다.
고유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목멱산의 신령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였다.
왕은 이르노라. 그대 백악(白岳)과 목멱산(木覓山)의 신령과 한강과 양진(楊津) 신령이며 여러 물귀신이여! 대개 옛날부터 도읍을 정하는 자는 반드시 산을 봉하여 진(鎭)이라 하고, 물을 표(表)하여 기(紀)라 하였다. 그러므로 명산대천으로 경내에 있는 것은 상시로 제사를 지내는 법전에 등록한 것이니, 그것은 신령의 도움을 빌고 신령의 도움에 보답하기 때문이다.
남산은 목멱산이라고도 하였는데, 통일신라 때의 풍수지리가인 승려 도선(道詵)의 『도선기』가 고려 문종 때 주목받았다. "개국 후 160여 년 뒤에 목멱양(木覓壤)에 도읍할 것이다."라는 구절 때문으로, 목멱양이란 목멱산 아래 땅이란 뜻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남산보다는 목멱이라는 기록이 자주 보이며, 비가 오지 않을 때 지내는 기우제를 백악과 목멱에서 거행했다는 기록이 다수 확인된다.
남산은 '종남산(終南山: 중국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의 남쪽 산이 종남산임)'으로도 불렸으며, '경사를 이끌거나 베푼다'는 뜻으로 '인경산(引慶山)' 또는 '열경산(列慶山)'이라 불리기도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목멱산은 곧 도성의 남산인데, 인경산이라고도 한다. 설마현(雪馬峴) 둘이 있는데, 목멱산 남쪽에 있는 것을 큰 설마라 하고, 산 동쪽에 있는 것을 작은 설마라고 한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한성부 산천 항목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목멱산은 곧 도성의 남산이며 열경산(列慶山)이라고도 하는데 도성이 그 위를 지난다. 인왕산에서부터 낮게 평평해지며 남쪽으로 뻗어 오다가 동쪽으로 휘어지며 솟아올라 이 산이 된다. 한 기슭이 동쪽에서 대소 설마의 두 고개가 되고, 왕십리현(往十里峴)과 동현(東峴)에 이른다.
『동국여지비고』에는 또한 조선 개국 초기에 세간에 떠돌던 동요와 그 일화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본조 개국 초기에 동요(童謠)가 있어 이르기를, '저 남산에 가서 돌을 떼내는데 정(釘) 남은 것 없다' 하더니, 남은(南誾)과 정도전(鄭道傳)이 사변으로 주형(誅刑)을 당하였다. 남(南)은 남은, 정(釘)은 정(鄭) 음이 같으니 도전을 말한 것이다.
이처럼 남산은 목멱산, 종남산, 인경산, 열경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한양 도성과 함께 그 역사를 이어왔다.
출처 / 내 손안에 서울